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토야마 이치로 (문단 편집) === 초기 === [[도쿄]] 출생. 명문 정계 가문인 하토야마 가문 출신이다. 아버지 하토야마 가즈오는 도쿄에서 [[중의원]] 의원을 지내고, 후일 중의원 의장을 지냈던 정치 거물로, 이치로는 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특이하게도 생일이 1월 1일이다.[* 이치로의 증손자인 [[하토야마 지로]]도 1979년 1월 1일생이다.]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영미법학과를 졸업 후, 아버지의 후광을 입어 이치로도 젊어서부터 정계에 입문해 1915년, 32세에 중의원 입성을 시작으로 이후 정계에 매진했다. 젊어서는 우익 정치인이자 강경보수 세력의 거두로 활동하였다. 문부대신 재임 시절[* [[이누카이 쓰요시|이누카이 내각]], [[사이토 마코토|사이토 내각]].] 정부의 지침을 따르지 않는 대학 교수들의 처분을 놓고 의회에서 실랑이가 벌어졌는데, 그들의 인사권을 가지고 있던 하토야마 문부대신의 질의답변이 걸작이었다. '''"상관없습니다. 따르지 않는 교수가 있다면, 전부 해고하면 됩니다."''' 이런 과격한 강성우익 성향에도 불구하고 의회민주주의를 견지하였기에 군부에게 '자유주의자'로 낙인찍혔으며, [[대정익찬회]]의 성립 이후로는 정치적으로 거세되어 낙향하게 된다. 패전 이후 하토야마는 순식간에 전후 일본의 정치 지도자급의 인물로 부상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를 감지했던 하토야마는 패전 직후인 1945년 발빠르게 보수 우익 정당을 하나 창당했는데, 그것이 [[자유당]]이다. 그러나 과거의 보수파 전력과 성장세는 이후 들어온 연합군 최고사령부에게 눈엣가시로 작용했고, 결국 1946년 하토야마는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해 '''공직 추방 명령과 금고형을 선고받는다.'''[* 추방의 공식적인 이유는 그가 1937년부터 영국과 더불어 이탈리아와 독일을 다녀온 것을 여행기로 작성했기 때문이었는데, 1937년부터 독-이-일 추축동맹이 논의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걸 꼬투리 잡힌 것이었지만, 실제적인 이유는 그의 전쟁 이전의 행적이었다.] [[파일:external/cache6.amanaimages.com/23007000555.jpg]] 전성기 시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